한글날 법회: 2017년 10월 9일 오전 11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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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9일은 한글날입니다.

한글은 세종대왕의 어명아래 신미대사께서 만드셨다고 합니다.

우리의 자랑인 한글날을 기념하기 위한 행사를 10월 9일 일요일에 가질 예정입니다.

많이 참석하셔서 거룩한 한글날을 기념합시다.


훈민정음 창제의 숨은 주역, 혜각존자 신미스님은

훈민정음 창제의 가장 큰 역할을 하신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몇 개 국어에 능통했던 스님들이 많이 계셨는데 (중국어, 범어, 빨리어, 서역의 여러 나라 언어 ) 특히 신미스님은 5~7개국 언어에 능통하셨다.

( 한글은 소리글자 - 실담어(산스크리트어)도 소리글자)
사찰 불사를 해도 중창불사 스님 이름만 기록되고 불화장이나 단청장 스님 이름이 올라가지 않는 것처럼 훈민정음은 세종대왕이  창제하셨다로 기록되고 신미스님의 이름은 기록되지 아니하였다.

훈민정음에는 불교의 법수가 다수 나타난다
훈민정음은 28 33장으로 되어 있는데, 28 33은 불교의 법수 - 28, 33, 예불때 범종치는 수이다.
'
훈민정음어지'(나랏말싸미듕귁에달아..)가 한글 108, 한문 54 (일부러 글자수를 맞추려고 노력한 흔적이 있다)
세종어지가 실린 월인석보의 장수 또한 108쪽이다.

법주사 복천암에 신미대사 부도탑이 남아 있다. - 이 부도탑에 근거해서 보면

스님은 5~7개국 언어에 능통 하다중국어, 범어, 빨리어, 티벳어, 일본어, 불교가 거쳐온 근접 국가들 언어 등 - 세종대왕이 한글창제를 생각했을 때 범어 등 언어학에 밝은 사람을 찾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신미대사는 광평대군과 친인척 관계가 있고, 출가 전에 이미 벼슬까지 하셨던 분으로
스님은
유교의 사서삼경과 불교언어학에 능통하셨던 분이었으므로 자연히 중용되고 세종대왕은 스님에게 특명을 내림 - 비밀로 해야 했으므로 집현전에선 잠깐씩 보고 주로 복천사에서 작업하셔야 했다.
세종대왕이 임종 몇 일 전에 신미스님에게 시호를 내리셨다.  
원래는 스님이 돌아가신 후에 시호를 내리지만 세종대왕은 반대로 죽기 전에 미리 시호를 책정해서 내리셨다.
시호: '선교종도총섭 밀전정법 우국이세 비지쌍운 원융무애 혜각존자(慧覺尊者)' - 무려 26자 여기서
우국이세(祐國利世 '나라를 도와서 세상을 이롭게 하신 분') 라는 표현과 존자(尊者)라는 표현이 크게 문제가 되어 시호를 내리자마자 엄청난 반대상소가 빗발쳤다 한다 - 하위지 홍일동 신숙주 등..
박팽년은 너무 심한 표현을 쓰는 바람에 파직까지 당할 정도였다 한다.

세종대왕이 서거하신 후 문종임금이 20일 만에 시호를 다시 바꾸었다.
(
옛날 벼슬이름은 요즘처럼 짧지 않았음, 예를 들어 요즘엔 '국무총리' 이렇게 하나만 붙여 주지만 예전엔 그 분이 일생 동안 받은 벼슬이름을 다 붙여 주면서 뒤에 '~국무총리' 이렇게 하였음)
시호: '대조계 선교종도총섭 밀전정법 승양조도 채용일여 비지쌍운 도생이물 원융무애 혜각종사' - 37
'
우국이세'를 빼고 '
도생이물(度生利物)'을 넣음 - '중생을 제도하고 일을 잘 되게 하신 분'
그리고 '존자'라는 표현이 하도 과하다고들 하니까 '
종사(宗師)'로 바꿈
, 세종은 서거 전에 속리산 복천사(福泉寺)에 불상을 새로 조성하는 등 사찰을 크게 중건하셨다.- 당대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 그럴 정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신미스님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은 당시에 한글창제는, 지금으로 말하면 미국이나 유엔에 알리지 않고 핵무기를 만든 거나 다름 없는 대사건이었다.
한글반포도 연말에 기습적으로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 동지때는 우리나라에 와 있던 중국사신들이 본국으로 다 돌아감 (황제에게 신년하례 하기 위해서) 이때 한달 정도 비는 기간에 기습적으로 반포 (12월 말일)하셨다.
이런 상황에서 한글이 신미스님이 만든 거다 발표를 한다면 신미스님은 물론이고 불교계에도 엄청난 악영향이 미쳤을 것이다.

<
복천선원연력> '1446년까지 4년에 걸쳐서 논의한 끝에 신미스님은 모음자음 소리글을 범서에서 참고하여
18
개의 자음과 10개의 모음을 기본으로 한글을 편찬하는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그 시험으로 해인사에서 장경을 간행하여 법화경, 지장경, 금강경, 반야심경에 토를 달고 번역하여 우리글 완성되었다'고 가지고 가서 세종대왕께 보여드리자, 대왕께서는 너무 기뻐하시고 크게 칭찬하시면서 '이걸로 노래를 한 번 지어보라' - 그래서 나온 찬불가가 '월인천강지곡'이고  '석보상절'은 부처님 일대기이다.

세종이후 연산군때까지 그 오랜 시간동안 한글로 만들어진 책의 65% 또는 85%가 불교경전이고, 유교글은 5% 정도이다.  정사대로 만약 한글이 집현전 학사들이 만든 글이라면 어떻게 이런 현상이 나타났겠는가?
신미대사는 철저하게 베일 속으로 가렸으므로 기록을 남긴 게 별로 없어 너무나 안타깝다.
역사에 의하면 한글은 신숙주 성삼문 등이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90년대 이후 학계에선 회의적이다.
성삼문 - 한글창제 무렵 집현전에 들어왔으므로 주도적 역할은 아니었을 것임
신숙주 - 창제 2년 전에 들어왔지만 다음 해에 일본 사신으로 갔었기 때문에 깊이 관여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을 것임
해인사 일타스님이 '원각선종석보(圓覺禪宗釋譜 부처님 일대기)'를 중국에서 발견해서 학계에 보고하셨다.
이 책이 최초의 한글 간행물로 인정된다면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보다 8년이나 더 앞서게 된다.
세종 20년에 만들어진 '원각선종석보'는 총 5권으로 되어 있는데, 나머지 4권이 아직 안 찾아져서 완전히 인정을 못받고 있다 한다.


※ 월인석보(月印釋譜): 석가모니 부처님의 일대기를 담은 책으로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의 합본 세조임금이 세종대왕께서 지은 월인천강지곡을 본문으로, 자신이 지은 석보상절을 주석으로 하여 합편한 책이다. 석보상절은 세조임금이 수양대군으로 있을 때 완성한 석가모니 부처님의 일대기이며, 월인천강지곡은 석보상절을 읽고 세종임금이 지은 찬불 서사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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